이 책은 35년간 꾸준히 암 연구를 해 온 생명과학자인 저자가 암 선고를 받은 후 자신의 투병 경험과 연구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의사 자신이 중환자가 되면서 질병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게 된 경험을 쓴 책들이 더러 있지만, 다른 병도 아니고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구해 온 바로 그 병에 걸리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저자는 그것도 암과의 운명적인 인연일지 모른다고 말하지만.
암 진단이 사형선고처럼 받아들여지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환경오염이나 스트레스 등 암 유발 요인들이 많아지다 보니 가족이나 지인들 중에서 암 환자 한 명 없는 경우가 드물 정도로 암이 흔한 병이 되었다. 의학의 발달로 초기 암의 경우는 물론이고 3기 이후 말기암도 적절한 치료를 잘 받으면 예후가 좋고 건강을 되찾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런 것도 다 남의 일일 때 얘기고, 암은 여전히 한국인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하는 무서운 병이다. 저자의 말처럼 그렇게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도 여전히 미로 속에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존재이다.
책은 일기 형식을 빌린 간결한 투병 기록과 암 치료의 역사, 최근 연구 동향 정리로 구성되어 있어서 암 환자의 개인적인 기록과 함께 연구자로서 암에 대한 전문지식의 소개를 담고 있다. 저자가 앓은 암은 이름조차 생소한 ‘비강상악동 미분화암종’으로, 증식 속도가 매우 빠른 심각한 악성종양인데다 희귀암이라 치료법조차 불확실한 종류였다. 판정 후 생존기간이 수개월에 불과한데다, 암을 제거하려면 오른쪽 눈부터 위턱뼈까지 통째로 들어내야 한다는 진단을 받는다. 다행히도 수술 중 시행한 조직검사에서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로 방향을 바꾸기로 결정이 내려져서 얼굴은 그대로 보존하게 되었지만, 수술을 받기로 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수년에 걸친 투병 기록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을 설명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를 유지한다. 저자는 암 진단 이후 몸 상태가 달라지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유지하기 어려워져도 바뀐 상황에 최대한 적응하려 애쓴다. 분명 내 몸이 예전같지 않은데도 건강할 때의 삶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달린다면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악화된 건강과 잃어버린 것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에 맞추어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킨다. 비록 예전처럼 활발히 연구를 할 수 없어서 아쉽고 제자들을 힘 닿는 데까지 지도해 주지 못해 안타깝지만, 자신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아무리 수십 년간 암을 자신의 표현을 빌면 ‘가까운 동료’처럼 접해오고 수많은 환자를 대한 의사라 할지라도 막상 자기 일이 되면 냉정을 유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경우, 명상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몸의 감각에 정신을 집중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훈련이 힘든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을 것이다. 저자가 암의 고통 속에서도 명상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연구자로서 지켜 온 삶의 자세가 구도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미국 유학 시절이나 귀국 후에나 변함없이 집과 연구실을 오가며 잡스러운 것들을 배제하고 연구에만 집중하도록 생활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생활 습관이 번잡한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기에 좋다는 저자의 말은 연구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새겨 둘 만하다. 어떤 분야든 진심을 다해 집중하면 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말처럼, 암을 연구자로서 대하는 자세나 투병자로서 대하는 자세나, 작은 변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핵심에 집중하였기에 흔들리지 않고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시한부 선고 이후에도 적절한 치료를 받으며 투병과 일상 생활을 잘 이끌어 왔지만,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결국 미각과 청각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러한 상실을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변화들 중 하나로 받아들임으로써 저자는 자유로움과 평온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암이 아니더라도 병들고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자체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과정이다. 잃은 것에 집착하기보다는 남은 것에 감사하며 몸의 변화에 맞추어 마음을 변화시키려는 저자의 태도는 암 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암 연구의 역사와 최근 동향에 관한 소개도 흥미롭고 유용하다. 주변에 암 환자가 있거나 본인이 환자라서 이 병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지식을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세포 연구에서 출발한 암 연구가 최근 분자생물학까지 발전해 온 과정이 잘 요약 정리되어 있다. 특히, 세포설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세포를 독립된 한 단위로 보고 연구하던 서구 과학의 환원론적 접근법의 한계를 깨닫고, 여러 세포들 간에 일어나는 유기적인 상호작용과 시스템적인 복잡한 생명 현상을 설명할 수 있도록 통합적 접근법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최근 동향은 흥미롭다. 저자는 그간의 암 연구가 지나치게 세포, 그 중에서도 내부의 유전자 변화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나무에만 집중해 숲을 보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했음을 지적한다. 이는 세포를 벗어나 그 외부의 미생물까지 포함한 다양한 생명체들이 서로 연결된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암세포와 주변 환경, 인체 시스템의 상호 관련성과 상호 의존성 연구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신체를 부분으로 더 잘게 쪼개어 분석하는 서구의 환원론보다 인체를 외부 환경과 조응하는 하나의 우주로 보는 동양의학의 총체적 관점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한, 인간을 독자적이고 독립된 개체로 보기보다 환경 속에서 환경과 상호의존하며 환경을 구성하는 일부로 보는 생태주의적 관점과도 통하는 듯 싶다. 낯설고 생소하게만 여겼던 분야가 어떤 면에서는 다른 분야들과 한 길로 통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이다.